(한국어는 아래를 봐주세요)
滋賀と京都の朝鮮学校を考えるとき2つの悲痛な事件が思い出されます。
2007年1月滋賀朝鮮初級学校に130余名の大阪府警が軍靴で学校を踏み荒らし強制捜査をした事件、2009年12月京都朝鮮第一初級学校に10余名の在特会幹部たちが巻き起こした「京都朝鮮学校襲撃事件」。もう10年よりも前になりますが、唯一「初級学校」を標的とした国家と民間による暴力としてはっきりと思い出されます。その時の子どもたちや同胞たちがこの10余年をどのように過ごしてきたのか考えただけでも胸が裂ける思いです。
しかし、滋賀と京都の民族教育の歴史は、悲痛な出来事ばかりではなく「勝利」の歴史でもあります。
1949年日本当局による朝鮮学校強制閉鎖後、日本の公立学校に強制編入された朝鮮学校はいろいろな形態の抵抗と維持を伴いました。日本学校内の朝鮮人学生たちで構成された特設学級「民族学級」の大多数は、放課後に朝鮮語や朝鮮の歴史を教えましたが、その中でも「滋賀型民族学級」は違いました。同胞たちの粘り強い抵抗と説得、要求を経て、3時間目から始まる「全日制民族学級」を勝ち取り、教員たちの給料も公立から保障し学父母委員会もつくりました。滋賀同胞たちは、民族教育の暗黒期に放棄せず「自主的民族教育」の灯火を堂々とつないでいきました。
京都は、日本で最初の朝鮮学校が「各種学校」という法的認可を獲得した場所でもあります。49年の閉鎖令以降、二度と日本政府が閉鎖措置をできないように朝鮮学校の「法的認可」を獲得しようという運動が始まり、その記念すべき第一歩となったのが「京都朝鮮学園」(認可学校数7校)でした。それだけではありません。2003年に紆余曲折の末、ほかの外国人学校とは違い、各大学の「個別審査」という突破口を開いた「朝鮮高級部生の大学入試受験資格獲得運動」の先頭にも「京都」が堂々と名前を残しました。京都ではそれ以前の94年に「全国連絡協議会」を結成しこの運動にとりかかっており、その成果として98年には京都大学が国立大学院初の朝鮮大学生の受験を認めました。
そして上記した「京都朝鮮襲撃事件」の主犯である在特会幹部たちを相手に起こした訴訟で、京都同胞たちは民事、刑事すべてで堂々と勝利します。この裁判は日本社会で「レイシスト(人種差別主義者)」たちの正体を明らかにするきっかけになったばかりでなく、民族教育の名のもと行われた裁判で初めての勝利という快挙をなしとげました。
私は、2011年3月東日本大震災をきっかけに「朝鮮学校と共にする人々 モンダンヨンピル」を結成し運営しています。
この10年間、いつも韓国や日本の人たちから「なぜモンダンヨンピルの活動をされるのですか?」ときかれました。もちろん在日民族教育に対する言い難いほどひどい差別や抑圧の歴史が、故郷の私たちに深い罪の意識を抱かせたことが活動の原動力になっていることを否定はしません。しかし、その原動力のもう一つの源は、その苦難の歴史を必ず勝利の歴史に逆転してきた同胞たちに対する尊敬の心です。
2007年と2009年、滋賀と京都で当時孤独な闘いを強いられた子どもたちが大人になった今日、朝鮮半島のたくさんの人々が彼らの平和を祈り叫んでいます。並外れた湿気と猛暑のように厳しい日本社会の中で、日本の心あたたかい仲間たちと、故郷の朝鮮半島の人たちで吹かせた涼しく快適な「分断を越える」風が、朝鮮学校の子どもたちの猛暑を吹き飛ばしてくれる風になるように願います。このプロジェクトの勝利のために最善をつくします。
朝鮮学校と共にする人々「モンダンヨンピル」 事務総長 金明俊
시가와 교토의 조선학교를 생각하면 두 가지 가슴 아픈 사건이 생각납니다.
2007년 1월 시가조선초급학교에 130여명의 오사카부 경찰이 군화발로 학교를 압수수색한 일, 2009년 12월 교토조선제1초급학교에 10여명의 재특회 간부들이 침탈해 벌인 ‘교토조선학교습격사건’.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유독 ‘초등학교’에 가해진 국가와 민간의 폭력이기에 기억이 또렷합니다. 그때의 아이들, 동포들이 어떻게 지난 10여년을 살아냈을지 생각만해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하지만 시가와 교토의 민족교육은 사실 상처만이 아닌 ‘승리’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1949년 조선학교 강제폐쇄 후 일본 국ㆍ공립학교에 강제편입된 조선학교. 여러가지 형태의 저항과 유지를 도모했지만 ‘시가형 민족학급’은 특별했습니다. 일본학교 내의 조선인 학생으로 구성된 특설학급인 <민족학급>은 대부분 방과 후에나 우리말, 우리역사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시가는 달랐습니다. 동포들의 끈질긴 저항과 설득, 요구를 통해 3교시부터 시행되는 ‘전일제 민족학급’을 얻어낸 것입니다. 선생님들의 월급도 공립에서 보장하고, 학부모위원회도 만들 수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민족교육의 암흑기에 포기하지 않고 ‘자주적 민족교육’의 불씨를 당당히 이어갔던 시가 동포들이었습니다.
교토는 일본 최초로 조선학교가 ‘각종학교’라는 법적 인가를 획득한 곳이기도 합니다. 49년의 폐쇄령 이후 다시는 일본정부가 함부로 폐쇄조치를 하지 못하도록 ‘법적인가’를 획득하자는 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첫 발을 땐 곳이 ‘쿄토조선학원’(인가 학교수 7개교)이었습니다. 그뿐인가요? 2003년에 우여곡절 끝에 비록 다른 외국인학교와 달리 <대학 자체의 판단>이라는 정부의 타협을 이끌어낸 ‘조선고급학생들의 대학입학 수험자격 쟁취운동’의 서두에도 ‘교토’가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미 94년 <전국연락협의회>를 결성하여 이 운동에 나섰으며 그 성과로 98년에 교토대학이 국립대 대학원 최초로 조선대생의 졸업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교토조선학교습격사건’의 주범인 재특회 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소송에서 교토의 동포들은 민사, 형사 모두에서 당당히 승리합니다. 이 재판은 일본사회에 ‘혐오,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정체를 낱낱히 밝히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민족교육이라는 이름을 걸고 진행된 재판에서 최초의 승리라는 쾌거로 기록됩니다.
저희는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을 계기로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을 만들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국, 일본사람들 양쪽 모두에게 10년 동안 받아온 질문이 있습니다. “이 일을 왜 하나요?” 물론 재일민족교육에 가해진 형언하기 힘든 차별과 억압의 역사가 고향의 저희를 깊은 죄의식으로 물들였고 그것이 원동력이 되었음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원동력의 또다른 중추는 그 고난의 역사를 기필코 승리의 역사로 만들어 낸 동포들에대한 존경심이었습니다.
2007년과 2009년, 시가와 교토에서 슬픈 경험을 한 아이들이 이제 어른이 되어갑니다. 그때의 외로운 투쟁이 아니라 이제는 온 한반도가 그들의 편임을 많은 사람들이 외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조선학교 아이들이 유달리 습기많고 매서운 폭염을 시원한 바람으로 이겨내길 바랍니다. 그 바람은 일본의 친근한 벗들과 한반도의 따뜻한 고향사람들이 만들어 낸 시원하고 쾌적한 ‘분단없는’ 바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승리’를 위해 여기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 김명준.